# 마당 판에서의 역학관계

 

  마당 판의 역동성은 무대극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렇다고 마당극만이 훌륭하니까 무대극은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80년 초에 나는 「새로운 연극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마당극은 궁극적으로 무대극을 포용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적(?)인 말을 해 놓은바 있는데 요즈음 그 의미를 새삼 실감하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만큼의 마당극 자산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다시 무대를 확보하게 되면 무대 역시 우리의 마당이 되어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펼쳐 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였다. 다시 말해 무대 혹은 제한된 건축물 구조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 자체를 열려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몇 해 전 연세대 대강당에서 공연했던 후분바 <꽃다지1>을 들 수 있겠다. <꽃다지1> 공연은 강당의 무대에서 공연되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마당 판이었고 판 굿이었다. 그 꽃다지 판 굿 공연에서 관객들은 의자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들썩거리고 있었다. 건축물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전연 그 외형에 구애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높은 천장의 그 대강당이 관객의 열기로 하여 도리어 압도당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마당 판이 무대를 점령했다 고나 할까? 그후의 '꽃다지'공연들은 주로 대학의 노천극장에서 벌어졌는데 연세대 대강당에서 공연되었을 때와 느낌에 있어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마당 판에서의 공연과 극장 안에서의 공연은 역동적 분위기를 만드는 근간이 분명 다르다. 한마디로 마당 판이 무대극과 다른 것은 인력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배우들의 모든 움직임과 동작선도 마당 안의 원심력과 구심력이라는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등장인물과 관객과의 모든 관계 또한 인력과 척력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신명의 교류이기도 하고, 에너지의 교환이기도 하고, 氣의 흐름이기도 하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데, 물리적으로 설명한다면 원심력과 구심력, 끌어당기는 힘과 밀치는 힘으로 이야기 할 수 있겠고, 이러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판의 기초적 원리일 것이다.

  모든 연극은 관객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여기서 끌어들인다는 말은 물리적인 용어이나 이것을 단지 관심을 환기시키고 고조시킨다는 의미의 문학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끌어들인다는 원래의 물리적 의미에는 氣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연행 안에는 모든 기의 흐름, 신명의 움직임, 에너지의 이동들이 작용하고 있다. 이것이 관객을 끌어들이고, 관심 갖게 하고, 불러일으키게 하고, 솟구치게 하는 것이다. 성공한 마당 판을 보면 판이 흥청망청 정도가 아니라 들썩이고 요동치는 느낌마저 받는 수가 있다. (그에 반해 가라앉고 움직이지 않는 판은 거의 실패한 마당 판이다.) 문학적 연극, 무대 연극에서 주로 대사에 의해 지적인 측면 혹은 정서적 측면에 대한 집중적인 이입을 요청하는 것과는 달리 마당 판에서는 지적인 측면이나 정서적인 측면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감각적인 측면까지도 아우르는 여러 가지 매체가 동원된다. 기의 움직임, 에너지의 교류, 생명력의 상호상승적 발현을 주동하기 위해 갖가지 기제들이 발휘되는 것이다. 문학적인 것만이 아니라 춤, 몸짓, 소리, 풍물, 깃발 등등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기를 이동, 교류시키는 많은 기제들에 대해 마당 판의 연출자는 감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도식적이고 딱딱한 판이 될 수밖에 없다. 극작술에 있어서도 대사가 있어서 그것을 형상화 한다기 보다는 판의 전체적인 큰 원리에 따라 대사가 배치되어야 한다. 이러한 고려가 있어야만 마당 판의 활력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정확한 판을 서울 공연에서는 별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지역패들의 공연에서 뜻밖에도 그러한 판을 만나게 된다. 특히 제주도 「한라산」패에게서 그런 힘을 많이 발견하게 되고 최근 대전 「우금치」의 공연에서도 그러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아마도 때묻지 않은 토착적 감수성이 그것을 본원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기의 흐름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마당극 연출을 가능케 하기 위해 일단 판에서의 등장인물의 이동, 동작선을 한번 생각해보자. 무대극에서 등장인물은 관객쪽에 등을 지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무대극의 관객은 한 면의 보이지 않는 벽을 뚫고 엿보고 있는 것이므로 배우는 엿보는 자를 위해 엿보임을 적극적으로 해줘야만 한다. TV드라마 같은 데서도 카메라를 양쪽에 배치하여 이동함으로써 화면은 배우의 전면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마당 판은 이와 전혀 다르다. 마당 판에는 전면이 없기 때문이다. 마당 판이라 하더라도 완전 원형이 아닌 삼면을 쓰거나 혹은 연출을 하다보면 중심이 되는 한면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무대극의 일면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렇게 마당 판의 방향성이 독자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라면 마당 판에서 배우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마당 판에서 공연을 하다보면 삼면이거나 혹은 원형이라 하더라도 중심이 되는 한면이 생기게 된다고 했는데, 누구라도 '저절로' 관중이 많은 쪽을 전면으로 삼게 되고 관중이 적은 쪽은 등을 보이게 된다. 만일 배우가 관객이 적은 쪽을 전면으로 사용한다거나 지나치게 자주 그쪽에 시선을 두게 되면 판에서의 힘의 균형은 깨지고 말 것이다. 관객 안에는 이미 힘이 배치되어 있고 배우 또한 그에 따라 '저절로' 사방을 향해 힘의 안배를 하게된다. 배우 자신의 자전하는 힘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관객과의 인력과 척력의 감지에서 비롯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배우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그러한 힘의 관계, 끌어당기고 밀치는 자력이 배우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 감지하는 배우가 좋은 마당 판 배우일 것이다.)

  마당 판에서의 배우의 움직임을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춤꾼의 춤사위 및 춤길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모든 춤꾼은 판에 등장하면 일단 중심을 잡는다. 살풀이춤이건 승무건 탈춤이건 어느 춤에서도 이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전범주에서 자신의 몸자체의 중심을 잡기도 하지만 공전범주에서 전체판 안의 관객과의 힘의 역학관계에서 중심을 잡기도 한다. 이러한 역학관계가 자전범주에서는 춤사위로 나타나고 공전범주에서는 춤길로 나타나면서 움직임이 연속되는 것이다. 마당 판의 배우는 춤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대사와 동작이 그같은 중심잡기의 연속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감지해야만 한다. 이를 감지하지 못할 때 관객과의 끌어당기고 밀치는 힘은 느껴지지 않으며 배우의 연기는 매우 어색하고 서투르게 된다.

  이러한 힘의 원리는 배우의 움직임에서 뿐만 아니라 판의 구획에도 작용한다. 무대극에서 등장인물의 위치와 동선은 무대상의 지도개념에 의해서 결정된다. 무대상의 지도란 프러시니움 아치에서 무대를 구분하고 어느 위치는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든지, 어느 위치에 어떤 색조를 비추면 어떤 감정을 나타낸다든지, 또 배우가 어떤 방향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움직이면 어떤 감정이 느껴진다든지 하는 도식을 정해놓은 것이다.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에 의한 무대상의 지오그라피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무대연출자는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정확하게 무대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구획을 잘 숙지할 것을 요구받는다. 마당 판에 있어서도 서구 무대극과 같은 식의 정태적인 지오그라피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동태적인 구획 구분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낱줄과 씨줄로 이루어져 있는 마치 거미줄과 같은 형태의 것으로, 연행의 과정에서 생겨나고 이동하는 모든 힘의 관계가 고려되어 배치될 수 있을 것이다. 판에서의 힘의 관계와 그 배치를 감지하는 것이야말로 마당극 연출의 기본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