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 탈춤 대사의 기능과 구현 원리
1. 탈춤의 대사, 연극의 대사
하회탈춤은 연극이며, 연극은 공연예술이다. 너무나 평범한 사실을 굳이 앞세우는 까닭은, 하회탈춤의 대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염두에 늘 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 록 채록본이라는 형식으로 탈춤의 대사가 정리되어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입체적인 공연물 로 읽어내지 못하고 서사물로서만 대한다면 하회탈춤의 온전한 매력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특히 하회탈춤처럼 구비전승 되어 온 공연예술일수록 서사문맥에는 드러나 있지 않 은 숱한 매력이 숨겨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여기서는 대사를 통해 하회탈춤의 진면목에 접근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배우(공연담 당자)와 관객(수용자) 사이의 어울림을 큰 특징으로 내세우는 하회탈춤에서 대사는 어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관객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선택한 대사 구현의 원리는 무엇인가를 알아볼 것이다. 연극에 있어서 대사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배우들에 의해 공연시 발화 되는 대사는 관객에게 서사적 줄거리를 인식시키고, 작품의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렇지만 공연시간의 제약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는 연극의 특성상,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대사의 양을 무작정 늘려나가기도 어렵다. 흔히 '경제성의 원리'로 설명되는 대 사의 특징 즉, 꼭 필요한 등장인물이 사건 전개에 관여하는 대사만을 작품에 담아야 한다는 것도 바로 공연이라는 특징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극적 대사는 보통 사람들의 일 상적 언술행위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되는데, 그러한 특징을 테니슨은 압축, 타당 성, 박자, 기교 등의 네 가지로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한 편의 연극에서 보여지는 '대사의 쓰임새'는 잘 된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을 판별하는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논의를 본격적으로 펴기 전에 전제되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서구연극 중심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하회탈춤은 우리의 전통연극이다. 우리 의 전통연극은 극장의 액자무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서양연극과는 상당히 다른 연극문 법을 지니고 있다.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보려는 대사의 경우에도 서양 연극에 비해 몸 짓언어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이미 차이가 난다. 서양의 경우에는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는 대사로 가득 차 있는 비극에서 보듯이, 고대 그리이스 시대 때부터 음성언어 중심 의 대사를 구사해왔으며, 대화 독백 방백 침묵 등 그 쓰임새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대사가 있다. 그런데 하회탈춤의 경우 채록본을 보면 대화만이 있으며, 그나마도 대사량이 아주 적 기 때문에 서양연극에 비해 수준 낮은 연극, 혹은 미분화 상태의 연극으로 오해 받기도 한 다. 그러한 입장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독백이나 방백은 시공간 이동에 제약이 많 은 무대극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개발된 대사이다. 하회탈춤을 비롯한 대다수 탈춤의 경 우, 기왕의 연구에서 강조되었듯이 시공간의 빈번한 이동이 극의 진행을 방해 할만큼 심각 한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구태여 독백이나 방백류의 대사 구사가 필요치 않았던 것뿐이다. 그대신 야외공연에 적합한 대사 구사를 위해 몸짓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므로 음성언어 중심으로 채록했을 때에는 대사의 양이 적을 수밖에 없 다. 그러므로 대사의 양이나, 사용되어진 대사 종류의 다양함만으로 작품의 우열을 논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여서는 안되겠다. 뒤에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음성언어와 몸짓언어의 절묘 한 어울림이야말로 하회탈춤이 하회탈춤일 수 있는 매력인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채록본의 불완전성 문제이다. 지금 현재 전승되고 있는 대부분의 탈춤 이 그러하거니와 하회탈춤의 경우도 무형문화제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공식 채록본으로 지정 된 것이 있기는 하나 완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랜 시간에 걸쳐 중단 된 것을 채록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잘못 전달된 부분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음성언어에 의한 대사와는 달리 몸짓 언어는 현장성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인데, 하회탈춤이 복원될 당시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창희옹은 놀이의 과장 자체는 기억하고 있으나, 그 연출이나 춤사위 등은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한 까닭에 대부분 소실되고 만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오랜 기간동안 구비전승 되면서 자리잡아온 몸짓언어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하루 바삐 시작되어 야 하며, 그때서야 하회탈춤의 진정한 복원이 이루어졌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 언급되는 바도 근원적인 한계가 있음을 미리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2. 야외공연과 대사의 기능적 배분
공연시 연극의 대사는 두 가지 의사 소통 체계를 가진다. 첫 번째는 공연상의 가시적 기 능으로써 등장인물(배우)과 등장인물(배우) 간의 의사소통이다. 특정 등장인물이 다른 등장 인물을 향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또 다른 인물의 반응을 가리키는 데, 이를 통해 극이 진행된다. 두 번째는 내면적 기능으로써 무대와 관객 사이의 의사 소 통이다. 무대상의 등장인물들 상호간의 대사를 통해 관객들은 극의 주제에 관한 정보를 제 공받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작가와 관객간의 의사소통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하회탈춤이 공연예술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면, 당연히 후자의 기능이 본질적인 것이며, 이의 효과적 실현을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대사의 특징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하회탈춤처럼 야외에서 공연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대사의 구현에 더더욱 세심한 배 려가 필요하다. 극장이라는 한정되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공연과 달리 하회탈춤 은 열려있고, 개방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극장은 소리의 전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여 러 가지의 장치들을 구비하고 있지만, 야외 공연에서는 그러한 도움을 전혀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취약점이 된다. 더구나 탈춤은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연기하기 때문에 배우의 발성 이 용이하지 않다는 점에서, 또 극장처럼 폐쇄적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관객들의 이동이 빈번해 집중력이 약화된다는 점에서도 공연하기에는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라 하겠다. 이러 한 공연조건에서 관객과의 의사소통은 극장공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해진다. 이처럼 관객과의 의사소통에 불리한 공연조건에도 불구하고 하회탈춤이 공연예술로써 뛰 어난 기량을 갖추게 된 이유의 으뜸으로 '대사의 기능적 배분'을 꼽아야 한다. 하회탈춤은 야외의 공연조건에 적합하면서도 극의 주제를 전달하는데 유용한 대사 구현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각 마당별로 차별화한 방식의 대사 사용이 바로 그것이다. 하회탈춤 대사의 이러한 특징은 주제를 구현하는데 있어서도 적합한 방식이어서 극적 완성도를 높여주며, 양반문화 에 대한 하회탈춤의 비판적 정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묵인 아래 합법적 차원의 공연물로 전승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이유라 하겠다.
2.1. 백정마당의 직접성
하회탈춤에서 양반의 권위는 애초부터 무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전승되고 있는 어떤 탈춤보다 비판적 정서가 강한 편이다. 무동마당이나, 주지마당은 제의적 성격이 강한 마당이 어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본격적인 극이라 보기 어려우나, 백정마당은 그렇지 않다. 사실상 극의 시작과 다름없는 상황에 백정의 걸죽한 입담이 터져 나옴으로써 더더욱 강한 효과를 주는 것이다.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탈판에 등장한 백정은 한 바탕 춤을 추면서 위세를 돋 군다. 이어 소 한 마리를 때려 잡은 백정은 염통과 쓸개, 불알을 끊어내어 망태에 담고는 관 객을 상대로 수작을 건다. '생원님'들로 규정한 관객들에게 소의 쓸개가 사람의 쓸개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양반들이 사넣으면 염치가 생긴다고 권유하는데, 그 자체가 양반에게 심한 모욕이 되는 것이다. 더구 나 소 불알을 들고 나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살려면 이것이 필요하다며, 양반들의 방만한 사생활을 꼬집어 주고 있다. 백정에게 있어 양반은 젊은 마누라 둘씩 데리고 살아가는 '오 즐'없고 염치없는 이들이며, "서푼어치도 안되는 양반 체면"으로 권위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이들이다. 당대 지배 세력의 성격이 이처럼 명쾌하게 규정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움을 안겨준 다. 이처럼 공격적인 공연이 별탈없이 지속된 것은 백정이라는 등장인물의 사회적 신분을 교 묘하게 극속에 끌여들여 이용한 대사이기 때문이다. 백정은 수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 천민중의 천민으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어서 그들의 불만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약점을 가진 집단이다. 그래서 백정마당은 여타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일인극 으로 꾸며져 있다. 양반 선비마당과는 달리 양반사회를 대표할만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기 때 문에 백정마당은 극적으로 존재하되, 양반의 입장에서는 없는 것으로 여겨야 하는 마당이 되어 버린다. 어차피 사회구조상 양반과 마주칠 일이 없는 계층이기 때문에 그들의 난폭함 을 눈감아 주는 편이 양반들한테는 편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백정이 터뜨리는 불만쯤이야 무시하고 넘어감으로써 양반의 여유로움을 보일 필요도 있는 까닭이다. 백정이라는 사회적 속성, 그리고 양반이 등장하지 않는 일인극이라는 극적 장치를 교묘하 게 활용하여, 직접적인 공격이 가능해졌다. 소의 쓸개와 우랑을 가지고 나와 한 바탕 입심 좋게 떠벌리는 백정의 대사에서 관객들은 더할 나위 없는 통쾌감을 맛보게 된다. 양반들을 "서푼어치도 안되는 체면"에 의지해 권위를 유지해가고 있는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백정에게 서 관객들은 무식한 백정이 아닌, 민중적 소망을 대변해주는 한 인간을 보았을 것이다. 백정마당의 직접성은 양반 선비마당과 비교해보면 그 의미가 더욱 뚜렷해진다. 백정마당과 양반 선비마당이 지배계급인 양반에 대한 비판 방식이 다른 것은 비판의 주체가 되는 인물 의 신분 차이에서 기인한다. 백정과는 달리 양반과 더불어 생활하는 하인들로서는 백정처럼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땅히 우회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몸짓언어와 음성언어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2.2. 양반 선비마당의 간접성
양반 선비마당의 특징은 음성언어와 몸짓언어를 필요에 따라 아주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 다는 것이다. 백정의 입심에 의해 권위가 짓밟히긴 했어도 마주치지 않기 때문에, 또 백정은 원래 그런 '놈'이니 양반의 아픔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양반 선비 마당에서는 문 제가 달라진다. 정자갓을 쓰고 부채를 든 양반과 등에 담뱃대를 꽂고 유건(儒巾)을 쓴 선비 는 통성명을 한 연후에 기생을 불러 하루를 즐기려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지체싸움을 벌인 끝에 망신을 당하게 된다. 양반 선비와 함께 마당에 선 초랭이 이매 부네 등은 양반의 지배를 직접 받는 신분이어서 그들의 권위를 지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 나, 오히려 그들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되어 관객에게 재미를 안겨주는 것이다. 양반 선비마당은 세 개의 이야기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양반과 선비가 통성명하는 장면, 그리고 부네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 그 다음이 지체 다툼을 벌이는 장면이다. 각각의 장면은 양반과 선비의 권위를 희화하는데 목적이 있는데, 각각의 장면마다 몸짓언어와 음성 언어의 사용이 잘 결합되어 있어 그러한 의도를 훌륭하게 관철시키고 있다. 양반 선비마당 대사 중 몸짓언어는 비판적 정서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음성언어는 특정한 문제점을 직접 들어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몸짓언어가 문제점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면, 음성언 어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 매듭 짓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자. 양반과 선비가 만나 통성명을 하기 위해 서로 큰 절을 나눌 때 초랭이는 궁둥이를 양반의 머리에 대며 선비를 향해 절을 한다. 예절과 법도를 하늘같이 알고 있는 그들에게 초랭이가 끼어들어 엉덩이를 들이대거나, 인사를 가로채는 행위는 그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의미를 가 진다. 이때 초랭이의 행위는 평상시 양반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어 이야기하지 못하는 피지 배계급으로서는 대단한 사건이며, 즐거운 일이 된다. 초랭이의 그러한 행위에 대해 양반 선 비가 화를 내자 초랭이는 "지도 인사 내도 이사, 인사하긴 마찬가진데 뭔 상관이껴"라고 응 대한다. 바로 이 부분이 앞에서 보여주었던 행위에 대해 매듭 짓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들을 살펴보자. 양반은 부네를 불러 은근히 즐기려 하지만, 부네는 호락호락 넘 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양반의 머리에 스멀거리는 이를 잡아주는 시늉을 계속한다. 부네의 이러한 행위 역시 양반을 조롱하고 비웃어주는 즐거운 기회를 관객들에게 제공한다. 그에 이어 초랭이가 "아이고 양반도 이가 다 있나"라고 함으로써 또 한 번 매듭을 짓는다. 그 다 음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초랭이는 양반과 선비가 지체다툼을 벌이는 사이에 그들 주위를 빙빙 돌면서 계속 그들을 비아냥 거린다. 관객들은 양반과 선비가 벌이는 지체다툼을 보는 한편, 그들을 야유하는 초랭이를 동시에 보게 되어 이중적인 재미를 즐기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초랭이는 직접 설명은 하지 않으면서도 몸짓 언어를 통해 그들의 행동이 비판받아 마땅 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그러다가 초랭이가 "난도 아는 육경 고것도 모르니껴"라고 직접 나 섬으로써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양반에 대한 공격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탈춤은 관객들이 미쳐 모르고 있는 양반들의 새로운 비리를 폭로함으로써 비판적 소임을 다하는 연극이 아니다. 이미 익히 알고는 있으되, 공개된 자리에서 차마 이야 기하지 못하는 사실을 드러내어 함께 즐김으로써 해방감을 느끼고, 비판의식을 고양시키는 그러한 연극이다. 양반 선비마당의 몸짓언어는 관객의 흥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하고 있으 며, 대사는 그러한 흥을 직접 진술로 묶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 두 가지가 어울려 하회탈춤 의 비판정신을 제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2.3. 중마당의 상징성
하회탈춤에는 음성언어를 절제하고, 몸짓언어에 맡김으로써 표현을 극대화한 부분도 있다. 중마당(파계승마당)이야말로 그러한 예로서 아주 적절하다. '맵시있다 부네걸음'으로 알려진 부네의 오금춤은 요념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한 춤동작에서 여자이면서도 길거리에서 오줌 을 누며, 그것을 계기로 외간남자와 정분을 나눌 수 있는 성격의 여성임이 알려진다. '능청 맞다 중의 걸음'으로 표현되듯이 중은 이미 올바른 수도자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로 보 인다. 그런 인물이기에 의도적이었든, 우연이든 부네가 오줌누는 광경과 마주치자 아주 쉽게 현혹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중마당은 중과 부네를 내세워 성적으로 타락 한 사회의 한 단면을 꼬집어 보여주는 것이 된다. 중은 신분적으로는 지배계층에 속하지 않을지라도, 속인이 아니므로 일상인과는 다른 위 치에 있어야 마땅하다. 조선시대에 들어 불교가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일반 속인들에게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진 종교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에 대한 비판이 단지 중 그자체에 머물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중과 부네, 그 두 사람이 만나 벌이는 풍경은 당대의 타락 한 사회현실을 보여주어 비판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으며, 하회탈춤의 관객들이 살아가는 세상도 그토록 타락한, 그래서 마땅히 극복되어야만 할 세상임을 느끼게 한다. 하회탈춤 담당자들이 중마당에서 음성언어의 사용을 배제하고, 몸짓언어로 그들의 비판정 신을 상징화해낸 것은 두 가지 측면의 효과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스님의 신분 문제, 또 하나는 성적 문제를 효과적으로 극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회탈춤의 주요 관객층 을 당시의 피지배계급이라고 보았을 때, 타락한 중들이 있다하여도 불교가 가지는 종교적 힘 자체가 우스꽝스러워 지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피지배계급에게는 형태야 조금씩 달랐을 지라도 불교적 내세관, 혹은 윤회사상이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굿판이라하더라도 불교적 요소는 융합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중을 등장시켜 비판의 대 상으로 삼으면서도 직접적인 표현을 자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성적 문제를 극화한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성의 문제가 삶에 있어서 본질적 요소라 하여도 그것을 공개적인 자 리에서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더구나 성적 타락의 문제를 다루는 경우 자칫하면 세속적 관심사만 충족시키는 선에 머물러, 정작 이야기해야 할 본질을 놓쳐버리기 쉬운 것도 주의해야 할 사항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중마당은 음성언어를 절제하고 몸짓언어를 택해 상징화시킴으로써 그러 한 위험을 넘어서서 산뜻하게 마감할 수 있었다. 타락한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관 객들로서는 이미 알고 있는 세상사이므로 굳이 음성언어가 없더라도 극중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하등의 어려움이 없으며, 공연담당자들의 비판적 정서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일부 하 회탈춤 공연에서는 부네의 유혹에 혹하는 중의 심경을 드러내는 대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 는데, 굳이 필요 없는 대사이며 원래부터 있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부분적이긴 하지만 양반 선비마당에서도 그러한 예를 찾을 수 있으며, 양반과 선비가 부네 를 두고 다투는 부분이다. 양반과 선비가 앙숙이 되어 체신없이 다투게 되는 원인이 바로 여자문제인데,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을 몸짓언어로 상징화시켜 극적 효과 를 얻고 있다. 부네가 양반과 선비 사이를 왔다 갔다하며 놀고 있을 때, 그 모습에 화가 난 양반은 선비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가 한 눈 팔게 한 다음 부네를 가로채어 버린다. 초랭이가 이 사실을 선비에게 이야기해주면, 화가 난 선비가 "아니 저 놈의 양반이, 여보게 양반, 자 네가 감히 내 앞에서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양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다. 양반과 선비가 한 여자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군더더기 없이 몸짓언어로 표현해냄으로써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본래적 목적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하회탈춤은 구비전승되기 때문에, 공연이 늘 새롭게 짜여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내용으 로 관객의 흥미를 유도하는 공연이 아닌 만큼, 모처럼 자리를 펴 찾아온 관객에게 흥겨움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그리고 그 자리를 통해 관객들이 삶의 신명을 되찾아 갈 수 있도 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반들의 억압을 피하면서, 소 기의 성과를 이루는 방법의 개발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하회탈춤에서는 대사의 기능적 배분 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야외공연이라는 불리한 공연조건을 현명하게 극복해나가도록 한, 대사의 기능적 배분을 오늘날의 연극인들은 눈여겨 보아야 한다.
3. '비움'과 '채움'의 원리
공연이 진행될 때 관객은 무대상에서 보여지는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반응을 보이게 된 다. 그 반응은 현재 사건의 인과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기도 하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무대와 관객 사이의 소통 관계이다. 관객의 그러 한 반응을 무대에 되돌리는 방식(feed-back)은 서양연극과 하회탈춤이 상당히 다르다. 서양 연극이 무대와 관객과의 단절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관객의 반응은 다만 심리적 상태로 머물게 되는 반면, 하회탈춤은 관객과의 일체감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그 반응이 심리적 상태로 머물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양으로 표출되어 행동화도 가능하게 되어 있다. 하회탈춤을 공연담당자와 관객이 비판적 정서를 공감하며 즐기는 한 판의 축제적인 것이 라하면,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인으로 관객의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극적기법을 손꼽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기능을 획득하는데 하회탈춤의 대사가 큰 기여를 하고 있는데, 관객을 향해 아주 치밀하게 짜여진 대사 처리는 오늘날에도 아주 유용한 공연기법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하회탈춤 공연시 관객들은 끊임없이 극에 반응을 보인다. 관객들은 배우들의 대사중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부분에서 박수를 치기도 하고, 소리를 질러 추임새를 넣 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흥에 겨워 탈판까지 좇아나가 함께 어울리는 경우도 있다. 관객들 의 그러한 반응을 흥겨움의 뜻으로 단순하게 처리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기록되지 않았으 나 아주 중요한 대사로 여기는 것이 하회탈춤을 바로 보는 것이 된다. 하회탈춤의 대사를 살펴보면, 관객의 반응을 적절하게 유도하기 위한 장치들이 세밀하게 배치되어 있음을 발견 하게 된다. 즉, 관객들의 반응을 치밀하게 계산해 놓고 던져지는 대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다. 배우와 관객의 소통 관계라는 측면에서 정리하자면, 배우들의 대사는 관객들의 특정한 반 응을 불러내는 '핵'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대사에 있어서 '핵문'(核文)이라 부르고, 핵문에 대해 관객들이 보이는 추임새는 '위성문'(衛星文)이라 부르기로 한다. 위성문에 관 객들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모든 대사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위성문은 핵문의 유도에 의해 마땅히 나올 수밖에 없는 추임새여야 하며, 그 추임새로 인해 핵문을 던졌던 배우의 다음 대사가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하는 기능을 안고 있어야 한다. 배우들에 의해 발화되는 대사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관객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위성문은 고정성이 현저하게 약 하지만, 아무렇게나 마구 뱉어질 수 없도록 사전에 의도되어 있으므로 공연담당자들이 예상 하고 있는 범위내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비움'과 '채움'의 원리로 설명하고자 한다. 극을 짤 때 대사의 특정 자리를 일부러 비워두고, 그 비워둔 곳을 관객들이 스스로 채우도록 하는 것이다. 관객들이 그 자리 를 채워주어야만 공연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극의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해 야 할 것이다. 하회탈춤을 비롯한 전통탈춤의 공연성과가 관객들의 성향과 그들의 자발성에 크게 좌우되는 것도 '비움'과 '채움'의 원리 때문이다. 요즈음 흔히 보듯이 관광객들을 상대 로 이루어지는 공연처럼 관객들이 불특정 인사들이거나 자발성이 크게 부족한 공연에서는, 대사에서 비워져 있는 자리를 관객들이 제대로 채워주지 못함으로 인해 공연성과가 떨어지 고 있다. 그런 점에서 '비움'과 '채움'의 원리에 입각한 관객들의 반응은, 배우와 관객간에 이루어지는 단순한 말장난과는 차원이 다른 대사 기능이다. 그러므로, 하회탈춤에는 대본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실제로는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대사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3.1. 백정마당에서 '비움'과 '채움'
앞에서 하회탈춤은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크게 가지고 있다고 했 다. 다음의 백정과장은 그러한 주제를 심화시키는데 '비움'과 '채움'의 원리가 유용하게 사용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백정은 관객들을 '샌님들'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의 신분적 위치를 정의해준다. 따라서 관객들의 반응은 생원님들의 반응이 되며, 양반들의 반응을 의미하게 된 다. 양반을 상대로 해서 직접 물건을 팔겠다는 설정 자체가 불경스러운 것인데, 더나아가 백 정은 자신의 제안에 보여주는 관객들의 반응을 매개로 해서 양반들을 비판한다. 백정마당에 서는 양반으로 설정된 관객들의 반응과 그것을 기회로 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백정 사 이의 주고받음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양반으로 설정된 관객들을 상대로 백정은 갓잡은 소의 염통이나, 쓸개, 불알 등을 팔려고 나서면서 그것을 빌미로 양반들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다.
백정 : 샌님들, ㉠ 염통 사소 염통요. 아직 뜨끈뜨끈해서 이대로 썰어가지고 히를 해머도 좋고 불포 감중에는 이 소염통이 제일이시데이. 사소, 사. 안살라니껴. [비움과 채움의 공간] ㉡ 그라마 이 소염통 사먹지 말고 쓸개나 염치없는 양반들 이거 사 넣어보소. 사람꺼 보다가 훨씬 커서 오즐 없는 양반 오즐 생기고. 염치없는 양반 염치 생기니데이. 사소 사. 이래도 안살라니껴. [비움과 채움의 공간] ㉢ 그라마 염통 사먹지 말고 진짜 우랑사소 우랑요. 우랑이 뭔도 모르니껴. 소불 알 말이시더 소불알. 이거 먹으마 양기에 역시 좋으니데이. 늙은 양반 젊은 마누라 둘씩 데리 고 살라카마 이 소불알 아이고는 안되겠시데이. 자, 사소, 사. 아, 공자도 자식놓고 살았니데이. 자식 볼라카마 이 소불알 아이고는 안되겠시데이. 사소, 사. 아따, 지 돈주고 지 양기 돋굿는데 남의 눈치는 말라고 보니껴. 사소, 사. [비움과 채움의 공간] 이래도 안살라니껴. 아따, 그 서푼 어치도 안되는 양반 체면 때문에 오늘 장사 망했다. 망했어. 오늘 장사도 안되고하이 내사 춤 이나 실컷 추고 노다 가야될따.
몸짓 대사를 제외하고, 채록본에 있는 음성 언어에 의한 대사만 뽑아보면 위와 같다. 대사 에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백정이 양반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서푼어치 도 안되는 양반체면"이라는 말에서 양반들의 권위는 완전히 추락한다. 그러나 그 정도의 이 야기를 듣고 멈춘다면 하회탈춤은 재미가 크게 없는 연극이다. 백정마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반이라는 절대세력의 힘을 관객들이 함께 비웃어 주는 것이다. 관객들의 대부분은 서푼어치도 안되는 양반체면 때문에 발생하는 숱한 이야기들을 이미 알고 있다하더라도, 그 것을 숨어서 쉬쉬하며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신분이다. 그러나 탈춤공연을 빌어 그러한 사 실을 드러내어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숨겨서 드러내지 못하던 이야 기를 개방된 공간으로 이끌어내어 함께 즐기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개방된 공간을 빌어 관객들 속에 숨어있는 신명을 끌어내는 극적장치로 활용되는 것이 '비움'과 '채움'의 원리이 다. 위의 대사에서 ㉠ ㉡ ㉢은 양반을 공격하는 백정의 대사를 나누어 놓은 것이다. 염통에서 쓸개로, 다시 우랑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따라 양반에 대한 공격의 정도는 점점 강해진다. 여 기서 관객의 반응을 촉발하는 핵문의 역할을 하는 것은 ㉠ ㉡ ㉢의 끝에 붙어 있는 '사소, 사'라는 강요성 주문의 대사이다. ㉠에서는 염통을 사라고 한다. 날 것으로 먹어도 좋고, 구워 먹어도 좋은 염통을 사는 것 은 별문제가 아니지만, 관객들은 거부감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배우 가 관객에게 접근해서 물건을 사라고 했을 때 선뜻 그것을 사주기 어렵다는 것을 염두에 둔 설정이다. 당연하게 관객은 움추려 들 것이기 때문에 "그라마 이 소 염통 사먹지 말고 쓸개 나 "의 다음 단계 대사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 관객중에서 염통을 사려고 나서 는 이가 있어도 연극이 진행되는데 큰 문제는 없도록 되어 있다. 염통은 양반의 권위를 비 판하는데 직접적으로 효용있는 것이 아니며, 다음 물건을 팔기위한 도입의 역할을 맡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런데 쓸개에 오면 사정이 다르다. 쓸개는 '오절없는 양반'이나 사는 것이기 때문에 관객 으로서는 더욱더 손을 내어밀기 어렵다. 당연하게도 ㉡처럼 "이래도 안살라니껴"라며 백정 이 사라고 강권하여도, 권유 받은 관객은 '안사요'라는 식으로 거부감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거부감은 쓸개를 사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관객 자신이 생원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쓸개빠진 인간이라는 식의 모멸감에 대한 불쾌감의 표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 정을 통해 백정의 야유는 불쾌감을 표시하는, 화가 난 상태의 양반들에게 행하는 공격적 행 위로 바뀌게 되어 양반문화에 대한 비판이라는 성격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우랑에 이르면 더욱더 해진다. 젊은 여자를 데리고 사는데 효과가 있다며 권유하지만 관객들이 살 수 없는 노릇이다. 효과가 있다고 하여 손을 내밀었다가는 젊은 여 자를 데리고 살면서, 많은 애로사항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훨씬 강한 거부감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이때 관객의 거부감은 남의 눈치나 보며 사는 것이 양반이라는, 즉 양반의 위선적 삶의 행태를 공격하는 빌미를 안겨주게 된다. 그 당시 양반이 라면 첩을 거느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이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의 부인 과 사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몇 명씩 거느리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냐는 식으로 야유하 며 공격하는 것이다. 백정마당은 화가 난 양반에게 물건을 사라고 강권하면서 슬슬 욕먹이 는 방식이어서, 백정을 맡은 배우의 순발력 있는 즉흥연기가 뒤따른다면, 양반에 대한 비판 의 효과를 크게 거둘 수 있는 판이 된다.
3.2. 양반 선비마당의 '비움'과 '채움'
양반 선비마당으로 넘어가 보자. 양반 선비마당의 외면상 중심인물은 양반과 선비이지만, 내면적 중심인물은 초랭이로 보아야 한다. 양반 선비마당에는 백정마당과는 달리 양반이 직 접 탈판에 등장하기 때문에 관객은 관객으로만 존재하게 되어, 탈판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상황이 된다. 초랭이는 놀이판에 참여한 대부분의 관객과 동일한 신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 게 탈판에서 관객들의 뜻을 대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초랭이는 양반과 선비가 통성명하는 자리에 끼여들어 그들의 권위를 조롱한다. 그러한 조 롱에 대해 양반과 선비가 노하자, 그는 "지도 인사 내도 인사, 인사하긴 마찬가진데 뭔 상관 이껴"라 한다. 이때 극적 상황으로 보면 양반과 선비에게 항의하는 듯이 보이지만, 하인이 양반에게 항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초랭이의 그러한 이야기는 실제로는 관객을 향하는 것이며, 그들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핵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사하기는 양반 이나 천민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가리는 것이 옳지않다는 초랭이의 주장 은 동질적 관객들에게서 당연하게 긍정적 답변을 받아내기 마련이다. 이때, "옳지" "잘해" "맞다"는 식의 관객반응이 나오게 되며, 그것이 초랭이의 대사와 어울려 강력한 비판 기능 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때 "옳지" "맞다"라는 반응은 너의 말이 옳다는 의미, 혹은 너가 잘 하고 있다는 단어적 의미 이상의 극적 의미를 가진다. 신분에 따른 차별이 부당함을 주장하 는 초랭이의 대사에 관객들이 반응을 하게됨으로써 선동의 효과를 확실하게 올리는 것이다. 더욱이 탈춤공연이 아주 특별한 행사였음을 고려할 때 그 자리에 모인 관객들의 집단적 반 응은 하나의 사회적 사건으로도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경'자 놀음도 동일한 맥락이다. 팔서육경을 읽었다는 선비의 대꾸에 양반이 막히자, 초랭 이는 나도 아는 육경을 양반이 모르면 되느냐는 식으로 나서서 전혀 엉터리 대답을 해댄다. '경'자가 들어있는 단어를 여섯 가지나 늘어 놓았는데, 팔만대장경, 바라경, 앵경, 길경, 월경, 세경 등은 양반들의 권위를 강화시켜 줄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어서, 양반들의 권위도 실상은 별 것 아니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효과가 제대로 살아나는 것도 관객의 반응 때문이다. 초랭이가 '팔만대장경' '중의 바라경' 식으로 대사를 뱉을 때마다, 사이 사이 에 풍물꾼들이 풍물을 쳐주며 기세를 돋우어 준다. 이때 관객 역시 '얼씨구' '잘한다'는 식의 추임새를 하게 되는데, 관객의 반응을 업음으로해서 초랭이의 주장은 단순히 개인의 생각, 혹은 재치 있는 비유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우랑을 두고 다투는 양반과 선비를 보고 개입하는 할미에게서도 '비움'과 '채움'의 원리가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양반 선비마당을 마무리하는 대사이기도 하 며, 그 다음이 혼례마당이어서 극적인 마당이 끝나기 때문에 공연담당자들의 비판의식을 마 무리하는 면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할미의 대사는 당대를 지배하는 양반에 대해 준열 한 심판으로 마감되어 있다.
할미 : 이 소부랄 하나 가지고, 양반은 지부랄이라 카고, 저 선비도 지부랄이라 카고, 저자 저 백정놈 도 지부랄이라 카이 대체 이 소부랄은 뉘 부랄이로 뉘부랄. [비움과 채움의 공간] 내 육십평생 살 았다마는 이 소부랄 가지고 싸우는 꼬라지는 처음 봤다. 처음 봤어 이놈들아.
할미는 부랄이라는 단어를 교묘하게 얽어 대사의 재미를 크게 하고 있다. 그 앞에 있었던 양반과 선비의 추태를 비난하면서, "소부랄이 도대체 누구부랄이냐"고 관객에게 되물어 강 력한 비판의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핵문의 역할을 맡긴다. 소의 우랑이 정력에 좋다는 소리 를 듣고는 체면을 불구하고 서로 다투는 것도 우습지만, 이미 백정마당에서 관객들이 소의 우랑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비판의 정도는 배가 된다. "이 소부랄은 뉘 부랄"이야며 관객에 게 던지는 소리에 맞추어 관객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으나, 대개가 우랑을 두 고 다투는 이들에 대해 야유하는 분위기로 가기 마련이다. 필자가 보았던 공연에서 어느 관 객이 "할마이 부랄"이라고 대답해 관객의 박수를 받기도 했는데, 여성에게 행해지는 음담의 측면도 있으면서 양반이나 선비가 아닌 민중들의 것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대답이었 다. 할미의 질문에 대해 그러한 류의 대답이 나올 수 있기에, 양반들의 권위를 완전히 제압 하는 "소부랄 가지고 싸우는 꼬라지는 처음 봤다"는 대사로써 양반 선비 마당을 마무리 지 을 수 있는 것이다.
3.3. 할미마당의 '비움'과 '채움'
할미마당에서도 그러한 예를 찾을 수 있다. 할미마당은 눈에 띌만한 대사가 없기 때문에 주목을 별로 받지 못하는 마당이지만, 관객과의 교류라는 측면에서는 큰 의미를 가진다. 할 미의 고단한 신세는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통해 알려진다. 열 다섯 살 먹은 나이에 과부되 었으며, 그뒤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삼시세때 좁싸래기도 먹기 어려운 형편이다. 경과 야 어찌되었던 쪽박을 차고 빌어먹어야 할 신세이다. 할미의 그러한 처지는 어차피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관객들로부터 동정심과 일체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관객들의 그러한 심리 는 할미의 동냥쪽박에 돈을 던져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공연경비에 보탬이 된다는 실 질적 뜻도 있지만, 관객들이 쪽박에 돈을 넣어주는 행위는 할미의 삶을 조금이라도 도와보 려는 마음이며,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힘든 삶에 대한 연민의 표현이다. 이때 쪽박을 내미 는 할미의 행위는 핵문의 기능을, 관객이 돈을 던져주는 행위는 위성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 다. 관객의 반응을 유도해 극을 진행시키는 '비움'과 '채움'의 원리는 하회탈춤을 공연담당자와 관객이 함께 만드는 연극으로 변환시킨다. 정확하게 관객의 반응을 염두에 둔 핵문의 사용 은 하회탈춤이 오랜 기간 동안 구비전승 되면서, 공연의 실제 체험을 통해 축적된 것이다. 이처럼 관객의 자발성을 확실하게 높여주는 대사 구사 방식이야말로 우리 연극이 세계에 내 어놓을 수 있는 자랑인 것이다.
4. 하회탈춤의 대사와 마당극
그외에도 하회탈춤의 대사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흔히 탈춤하 면, 풍물에 맞추어 춤추고 노는 연극정도의 선입견으로 대하기 쉬운데 탈춤 속에 구현되어 있는 대사의 기능과 구현원리를 인식한다면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음성언 어에 의한 대사의 양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회탈춤에는 감칠 맛나는 대사들이 도처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양반과 선비가 지체다툼을 벌일 때, 자신이 우월하다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상대방이 대는 근거를 배로 부풀려 되받아치는 과장법이다. "팔대부란 사대 부의 갑절이지" "문하보다는 문상이 높고, 시중보다는 시대가 크다" "팔서육경" 식의 대사는 아무 연극에서나 보기 어려운 멋진 대사임이 분명하다. 상대방의 기를 꺾기 위해 곱절이나 되는 이름들을 나열하여 승리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다함께 추락하고마는 묘미를 보여주는 대사들이다. 양반 선비마당에서 양반의 능청스러운 대사도 연극을 보는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는 것이 다. 백정이 '소부랄'을 팔러와서 양기에 좋다고 말하자, 서로 사려고 다툰다. 그때 양반은 "어허, 아까 야가 내보고 먼첨 사라했으이께네 이 부랄은 내 부랄일세"라며 주장을 한다. 어 떤 물건을 자신이 가지기 위해 내어놓는 근거치고는 어이없어 보이지만, 자신의 논리에 마 음대로 꿰어맞추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양반들의 성격을 이보다 잘 보여줄 수는 없을 것같 다. 이처럼 하회탈춤의 곳곳에 숨어있는 빛나는 대사들이 연극을 보는 재미를 한층 높여주 는 것이다. 이른바 '개화기'이래로 일본을 통해 유입된 서구극이 우리나라 연극의 주류를 이루어 왔 다. 마치 서자가 적자를 밀어내고 가계를 이어가는 꼴이 되어 버렸는데, 그러한 흐름에 대해 심각한 반성이 뒤따라야만 한다. 물론 전통극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노력을 해온 경우도 없진 않으나 탈춤의 외형적 구성 원리를 그대로 답습하거나, 혹은 특정 부분을 패러디화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반성해야 한다. 전통극의 현대적 계승이 라는 실험이 연극사적인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탈춤의 존재방식 자체를 깊이 있게 연구하 고, 그 원리를 오늘의 실정에 맞는 것으로 재생산하여야 한다. 여기서 다루어 본 대사의 원 리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는데 가장 적절한 방식의 대사를 배분하는 기능과 '비움'과 '채움'의 원리에 입각한 대사 구사력 등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탈춤의 현대적 계승에서 가장 큰 성과를 남긴 것으로 알려진 마당극의 경우에도 하회탈춤 대사의 기능과 구현원리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당대의 억압적 질서에 날카로운 공격을 퍼 부우면서도 그 자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함으로써 극적 완성도를 높여낸 탈춤 공연자들 의 예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과장된 방식으로 관객을 이끌어내지 않고도 자연스 럽게 관객의 자발성을 불러 일으키는 대사 구사력을 잘 연구해, 오늘날에도 유효한 공연 기 법으로 정착시키는 것이야말로 창조적 계승의 가장 바람직한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