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월부터 3월 까지 독일 한문덴 임업시험 장에서 공동연구를 하는동안 영국여행기
다음은 1994년 1월 24일 부터 2월 1일 까지 8박9일간에 걸쳐 영국의 대학 및 연구소를 방문 공동 연구에 대한 토의 및 검토를 한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1월 24일 한문덴을 출발하여 본, 쾨른을 거쳐 오스텐디드에서 영국으로 건너가다. 94년 1월 8일 독일 한문덴에 도착하여 초저온 저장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일차 실험을 끝을 내여 배양실에 시료를 배치한후 한동안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하여 영국에 임과대학 및 임업관계 연구기관과 대학 조직배양관련 학과를 방문 할 기회를 만들었다. 이 기회를 통해서 공동연구를 할 수있는 기회와 상대 연구원들을 물색할수 있었다. 이들에 대한 내용을 기행문 형식을 빌려 정리한 것이 다음과 같다.
독일의 12월 부터서 2월 말까지의 날씨는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거의 햇볕은 찾아 볼수 없는 구 름, 비, 또는 눈 그리고 또 구름이 계속되는 음산하고 음침한 날씨가 계속되는 계절이다. 1월24일 새벽 7시기차로 Hann Munnden을 떠나 Kassel에 가서 ICE로 갈아타고 Frankfurt를 지나 Bonn에 도착하여 독일정부의 수도를 구경하였다. 통일 정부를 이룩한 역사적인 임무를 마친 독일 연방정부의 국회의사당과 정부청사가 크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층짜리자그마하고 옆으로 길게 늘어선 청사가 바로 국회의사당 그 옆으로 크고 넓은 라인강의 흐린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이나 정부청사에 비하면 너무나 작아서 놀랬다. 책가방 크다고 공부잘하냐는 학생들의 joke가 생각이 났다. 독일 정부 청사를 보고 지하철로 본대학역에서 내려서 본대학과 베 토밴의 생가를 구경하고 베토벤이 얼마나 노력했든 인물인가를 다시 생각해본다. 보청기가 베토 벤을 위해 생겨난것 같이 생각이 되었다. Bonn에서 기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Koln에 오후 3시에 도착하여 저녁 8시 30분 저녁 기차시간이 되기까지 대성당을 보았다. 100여 메터에 이르는 건물 높이와 그크기는 사람을 압도한다. 1248년에 착공하여 1880년에 완성했다는 632년간에 걸쳐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크다는 표현보다는 마치 하늘을 가두워 놓은 건물 같고 색유리창 또한 화려하고 장대한 것이였다. 1882년 우리나라는 동학란이 일어났고 그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서 온통 나라가 혼란 한 그때에 이들이 이룩한 예술적 업적이란 대단한 것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시 기차로 배를 타는 Oostende로 떠나 밤 12시 30분에 ferry에 올랐다. 여름 성수기에는 자 리가 없어 비좁다는 배가 쓸쓸 할정도로 승객이 적었다. 한밤중의 배여행은 어떤 때나 똑같이 별 로 유쾌한 것이 못되는 같았다. 자다깨다 억지로 참고 3시 30분에 Ramsgate에 도착 출입국 수속 을 마치고 버쓰로 30여분 타고가서 4시30분 London행 기차를 탔다. London까지 가는 통근열차 같다. London Victoria역에 6시30분에 도착했다. 피곤이 겹치고 머리도 아픈것같았으나 Fast Food 로 아침을 때우고 오후에 갈 Oxford로 기차가 떠나는 페딩턴역에 지하철로 가서 짐을 맡기고 아 침절 관광을 떠나 본다. 아직 information이 문을 열지않아서 지도한장 얻지 못해 어딘가 어딘도 모르고 역을 나왔다. 바로 역에 Hyde park가 있었다. 160헥터의 광활한 공원아닌 산림이였다. 마 침 아침 햇살이 찬란히 비추고 잘가꾸워진 잔디, 아람드리 너도밤나구 群集, 꽃망을이 터져나오는 풍년화, 그리고 여러가지 변이를 가진 호랑가시(Ilex)나무류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사이 로 난 길을 London의 젊은이들이 죠깅을 하고 가끔 두서너명의 관광객들이 다니기도 한다. 그저 평화롭다는 느낌으로 가득찬 분위기, 강처럼 흐르는 못위에는 백조, 원앙, 물오리들이 자맥질에 한 창이였다. 9시30분이 되어서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1구간 티켓을 샀다. 약 3파운드 먼저가는 곳이 지하철 역지도를 보고 가까운 St. Paul대성당에 갔다. 성당내부에 마침 일본인 단체관광객들이 있어서 설 명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성당내부는 유롭의 것과 비교하면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은 것이다. 밖에 나와 독일에서 받은 EC공동 Check로 은행에서 100파운드를 찾았 다. Card를 확인하고 곧바로 돈을 지불했다. EC 경제통합이 이루워 져가는 한 단계이겠지요. 그러 나 Card Item을 적는데 애를 먹는 것을 보고 EC 통합언어가 있어야 겠다는 생각도 했다. 일일 ticket은 지하철 뻐스를 다 탈수가 있는 것이여서 이층 뻐스를 타고 이층 제일 앞좌석에 앉아서 시내 구경을 하면서 웨스트민스트 사원앞에 내렸다. 비 관광철 이지만 이곳에는 관광객들로 매우 분비고 있었다. 거대한 사원 내부에는 다시 박물관이 있고 5파운드를 내고 그안에 들어가 보았다. 에리자베스 일세 여왕의 무덤, 수많은 왕들의 관들이 놓여있고 그들은 각각 작은 교회를 방불케하는 각각의 방으로 이루워져 있다. 대리석 조각으로 누워있는 밑에 관이 그대로 있다. 역시 아는 것 만큼만 느낀다고 누군가 말했지요. 도통 모르겠다. 영국의 역사에 나온 수많은 인물들이 대영제국의 역사 를 만든 인물들이 누워있는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스코트랜드왕, 웰스가의 왕비들이 있는 곳을 돌아나오는데 쉘리, 워드웨스, 섹스피어를 보았다. 내가 학교에서 배워 알고 있는 몇사람들 이였다.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을 보아야 했기에 안내인에게 물어 보니 오든길을 돌아나와 들 어오는 길에있다고 한다. 섹스피어의 대리석흉상 조각이 아주 잘생겼다는 감이 있었다. 돌아나 와 다윈의 흉상을 찾아보았으나 없어서 앞에 있는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you are here라고 한다. 바로 내가 서있는 돌이 다윈의 묘비석이였다. +-------------------------+ | Charles Robert Dawin | | Born 12 February 1809 | | Die 19 April 1882 | +-------------------------+ 이름과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이 색여져있는 3자 x 4자 크기의 돌판이다. 바로 박물관 입구 표받는 곳에 있으니 모든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곳이다. 진화론을 제창하여 자연과학의 역사를 바꿔 놓 은 인물, 그리고 적자생존의 자연도태의 이론을 정립하여 진화과정을 설명했던 인물, 이 다윈이 제창한 이론들이 현대의 자유무역 경제의 기본 논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제학에 문외 한인 나는 가끔 그러한 생각을 할때가 있었다. 적자생존의 이론은 지금도 내앞에 남아있는 인생사 리를 빈틈없이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가 되어 있음이 엄연한 현실이다. 개체의 생존은 집단을 위해있고 집단의 생존은 종 전체의 끊임없는 존속을 위해 있는 것이라면 그들 개체와 집단과 종 사이를 흐르는 것은 DNA라는 변하지 않는 강력한 유전인자에 의해 이루워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체의 유한함은 곧 그속에 흐르는 유전정보의 무한함으로 보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집단의 특유한 원형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위대한 영국인 다윈을 보고 밖으로 나왔 다. 웨스트 민스트 사원 출구의 바로 왼쪽으로 Big Ben의 시계탑이 있고 10여분 거리에 테임스 다리가 있다. 구름이 오락가락 했으나 좋은 날씨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대부분 학생 단체들이 많 았다. 다리위에서 Big Ben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12시가 훨씬 넘어 배가 고파졌다. James Park 를 찾아가는 도중에 식당에 들어갔다. 아마 영국 saraly man들의 점심 식당인 모양이다. 샌드위치 와 맥주 한잔에 6파운드이니 독일보다 물가가 상당히 비싼편이다. 공원은 새들의 낙원이여서 많은 새들이 사람에게 와서 먹이를 청합니다. 바로 앞에 하얗게 우뚝서있는 것이 버킹검궁이다. 깃발이 없으면 여왕이 부재라고 한다. 오늘은 깃발도 없고 11시부터 하는 근위병 교대식도 없다고 한다. 관광철에는 매일 겨울에는 이틀에 한번씩하는데 근위병 교대식이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하는 표 식이 영어와 일본말로 붙어있다. 일본인들의 관광코스임을 알수있었다. 이젠 Oxford로 돌아가 일찍 쉬어야 래일 Oxford대학에서 할일을 정리할수있을 것같아 Victoria역까지 걸어와 그기서 tube로 페팅턴 역으로 왔다. 2시30분 Intercity 기차로 Oxford에 갔 다. 승객이 거의 없는 빈칸에 두서너명이 타고 있는 특급열차 내부시설은 우리나라 새마을 정도이 지만 군데군데 의자를 띠워서 식탁이 놓여있다. London교회는 시내와 사뭇 다른 풍경이다. 펑퍼짐 한 들판 그위에 가끔 숲이 보이고 또 초원 그리고 골프장 같은 잔디가 연속이 되어있다. 한시간 여만에 100Km 떨어진 Oxford에 도착 아주 작은 시골 간이역 같으나 깔끔한 곳이다. Information 에서 지도와 호텔을 물어 본다. 지도를 주면서 예쁜 금발안내원이 밖으로 나가 왼쪽으로 돌면 B&B(Bed and Breakfast)가 많다고 이야기 해 준다. 역앞을 나와 바로 제일 가까운 B&B를 찾아들어가서 방예약을 했다. 목욕, Bed, TV, 아침까 지 30 Pound, 목욕실이 없는 것은 20 pound라고 한다. 래일을 위해 목욕실이 있는 30pound 짜리 에 들어가서 짐을 풀고 자겨온 정장을 다림질(다리미 빌려)을 하고 그동안 피곤에 깊은 잠에 빠졌 다. 일어나니 7시 두어시간 숙면한것 같다. 밖은 비도 내리고 아주 깜깜한 어둠이다. 시내 쪽을 향 해 걸어가다가 중국집이 있어서 들어가 수프가 있는 것을 시켜먹고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젊은이들이 세차게 부는 바람속을 뚫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세계적 학문 도시 Oxford에 온것이 실감이 났다. 도시 전체가 대학이다. 그리고 젊은 학생들, 정장을 하고 모자를 쓰고 점잖게 걸어다니는 것은 교수풍의 사람들이다. 저녁에는 창밖의 거목인 너도밤나무가 가지가 뿌러지는 것같은 바람소리를 냅니다. 밤새 불어대는 바람은 시골 고향에서 듣는 대나무 바람소리 보다 훨씬 더 거센것 같았다. 25일 아침 지난번 대만학회에서 맞났든 Stainforth박사와 약속한 대로 (실은 25일 옥스포드역 에 도착하기로 함, 그러나 여행에 피곤해진 몰골로 옥스포드를 방문하는 것보다는 하루 일찍와서 쉬고 방문해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루 일찍 출발하여 왔음) 9시 20분쯤 역에 가서 나를 기다 리고 있는 그를 맞나 같이 시내구경을 다닌다. 걸어다녀도 충분한 작은 도시다. 정네모꼴의 건물 3층 - 4층 어김없이 대학으로 셀수없이 많은 대학들이 모여있는곳 학생들이 들어다니는 문과 visitor가 들어가는 문이 다르다. University park옥스포드의 유명한 크리켓트 시합이 열리는 곳이 다. 프른 잔디 밭 가장자리에 심어져있는 벗나무에 꽃이 피어 있다. 그만큼 기후가 온난한 곳이다. 방울꽃(우리나라에서는 3월 말이나 피는 꽃)이 많이 피어있고 수선의 신초가 싱그럽게 올라와 있 다. 11시에 Oxford의 Oxford Forest Institute의 Dr. Kanoski와 맞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나 10 시 30분경 도착하여 이야기 하였드니 구내 찻집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이시간이 독일과 같이 아침 차마시는 시간, 학생들, 교수들 차를 한잔씩 가지고 시끄럽게 이야길 하고 있다. Stainforth는 OFI 의 소장인 Burley박사와 친구인데 Burley박사(지난 태국 창마이 학회에서 내가 발표할때 좌장이 였음)가 마침 Africa출장 중이라서 나에게 별로 크게 안내 할일이 없어져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독일에서 fax로 옥스포드에 찾아가서 내연구 계획을 같이 검토하고 시간이 있으면 Strategy for Gene Conservation of Forest Tree Species in Korea의 제목으로 Seminer를 하겠다 고 제의 했드니 Oxford는 많은 방문객들이 있어서 어느누구나 쉽게 안내하고 Seminer를 할수없 다는 내용의 Kanoski의 fax를 받고 내가 온것이다. 11시가 넘어 작은키(나보다는 크지만)에 깡마 른 체격에 눈만 반짝거리는 Russia풍의 사나이가 골덴바지에 T-shirt차림으로 나타났다. Dr. Stainforth는 가고 Kanoski와 대담이 된다. 가져온 연구계획서를 펼처보이고 열심히 설명하였다. 도대체 영어 발음이 알아듣기 힘이 들었다. day를 다이라고 해서 한참만에 감을 잡는데 어찌나 말이 빠른지 정신 바짝차리지 않으면 진수를 놓칠것 같았다. 말이 빠른 사람은 머리회전이 빠른 것이라는데 너무 빨라서 더듬거리게 되기도 하는 것인지 몰라도 여하튼 영국에서 처음으로 말이 빠르고 발음이 걸리적 거리는 사나이를 맞났다. 내 연구계획서 (Cryopreservation에 대한 임목의 세포 및 조직의 영구보존)와 나의 발표논문 내용(5년간에 32편)을 보고 정중히 자기연구실로 안내 했다. 그기서 다시 1시 부터 28명의 석박사 대학원 생들에게 semier를 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그리고 나의 연구계획서가 OFI에서는 counterpart가 없어서 곤란하니 자기가 영국에서 이연구 thema에 걸맞는 연구가를 소개해주겠다 고 하면서 나의 영국 체제일정을 물어보았다. 4일짜리 pass를 가지고 3일 남았음을 감안 노팅검대 학, 에딘바라에 있는 삼림연구소 그리고 토,일은 쉬고 월요일 East Malling의 국제과수연구소와 London 대학교 Wye College가 있는 Ashford를 가기로 게획을 결정 20분내에 Schedule이 Computor에서 나오고 시간 약속은 오후에 fax를 받은 후 다시 결정하자고 했다. 세계적으로 잘되 어 있다는 도서실로 안내하고 한시까지 정보자료를 조사 해보라 했다. Cryopreservation에 관한 data base를 뽑아보았으나 역시 영국의 연구 자료는 많지 않았다. 한시가 되어 강의실로 들어가 slide를 가지고 (프랑스와 타이에서 발표한 것을 종합한것) seminer에 들어 갔다. 28명중 약 20여 명의 학생과 Kanoski교수가 참석하였다. 한국 촌놈이 여기서 세미를 한다니 별것이 아닌지 몰라 도 제 개인에게는 큰감동이였다. 1시간여 때로는 원고를 보기도 하고때로는 그냥 말로 설명하기도 하면서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질문도 받고 답변도 했다. 이해하는 것같은 표정들이였다. Kanoski 의 강평에 박수로 세미나는 막이 내렸다. 점심를 먹지 않은 것도 모르고 지났다. Kanoski가 오후 5시쯤 fax가 오면 schedule을 확정 할터이니 시내 관광을 하고 오라고 했다. 시내에 나와 낮익은 캔터키 후라이 치킨(미국 여행시 가장 많이 이용)집에 들어가 요기를 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는 어린 여학생이(보아서 23,4세) 담배불을 빌려달라고 한다. 대충담배 피는 것이 여학생들인 이곳 풍 습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커피 한잔에 쵸코렛 한개로 점심을 때우는 것같은 학생이 안되어 보여 전공이 무었이냐고 물어보니 잘못 알아듣는 것같았다. 내 영어탓인가 생각했으나 자기는 그리스에 서 온 유학생인데 영문학이 전공이라고 한다. 내영어나 비슷한 수준인것 같았다. 여하튼 공부한다 는 것은 무척이나 힘이 든 일인 것이다. 그기다가 저렇게 돈까지 없으면 더욱더 힘 들것 같은 생 각이 들어 우리 학생들을 생각 해 보았다. 4시만 되어도 밖은 어두워 지기 시작 했다. 뾰죽탑이 있는 건물들을 둘러봅니다 마는 모두 학교입니다. 300 - 400년이 된 학교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 은 저녁에도 공부가 있는지 부지런히 왔다 갔다 했다. 5시가 넘어서 다시 Karnoski를 찾아 가니 거의 완벽한 schedule을 짜놓고 상대편과 시간 약속을 다해 놓은 프랜을 내놓았다. 빈틈없는 사람 임을 다시 느꼈다. 그리고 Oxford에서는 내가 계획해간 cryopreservation 과 같은 연구를 하지 않 지만 3개월정도와서 OFI의 도서실을 이용하면서 공동연구를 해도 좋다고 했다. 실은 영국에 온 가장 큰 목적은 1년간 Oxford에서 공동연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였다 (세계적인 명성의 대학에 서 서튼 영어를 바로 잡고 국제적인 학자들의 대열에 발돋음하기 위함이였다). 그러니 3개월 가지 고는 부족 할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1년간의 공동연구계획서에 sign을 받아 우리나라 학술진흥재 단에 신청을 해야 내년 2월 1일 부터 저후년 1월 31일 까지 영국 유학이 실현되는 것인데 그일이 잘되지않고 다른 대학 연구소로 넘겨주 겠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내가 가지고 간 연구 계획서는 counterparter가 없어 실현이 어렵다고 하는데 별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짜 준 schedule대로 5명의 연구원 및 교수들을 맞나 봐야 할 순서가 남아있게 되었다. 고맙다는 인사 와 다시 맞날수 있게 되길 바라는 단순한 인사말 See you again이 나에게는 다른 특별한 뉴앙스 를 남기고 혜어졌다. 깜깜해진 거리에서 어제 묵었든 호텔을 찾아갔으나 오늘은 방이 없다는 No vacant의 표식이 나붙었읍니다. B&B, 아무리 찾아 다녀도 1시간여를 헤메도 발견하지 못하고 아 침에 Stainforth가 예약을 해두었다가 취소해버린 Oxford Royal Hotel를 찾아 갔읍니다. 다. 사실 이호텔에는 방이 있다는 표식이 붙어 있음을 B&B를 찾아 헤메면서 보았으나 비쌀까봐서 들어가 지 않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비싸지 않아 잠만 자는데 30파운드를 냈다. 가난이 몸에 베인 육이오 세대라는 것이 다시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근면과 절제가 몸에 베인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때때로 이러한 나에게서 벗어나고 픈 강한 충동을 외국여행 할때 마다 느 껴 본다. 역에가서 coin lock에 넣어 놓은 짐을 꺼내 오면서 역앞 중국집에서 밥과 고기국을 시켜 먹고 호텔로 돌아와서 내일을 정리했다. 깊은 숙면을 하고 27일 아침 7시 30분 Oxford를 출발 버 밍검에서 갈아타고 노팅검 농과대학이있는 Loughborough를 찾아 갔다. 그곳도착 시간이 10시 17 분이고 그곳에는 키가 장대같이 큰 Peter Alderson 박사가 꺼붕한 차림으로 마중나와 있었다. 처 음 보는 사이이지만 작은 역사에서 금방 알아보았다. 수인사를 나누고 자기차를 타고 학교까지 갔 다. 주위는 안개로 덮여있고 밭과 목초지가 평평하게 펼쳐진 시골 풍경의 길을 20여분 달려 학교 에 도착했다. 자기 연구실에 가서 자기 연구이야기와 너도 밤나무 배양에 관하 대량 증식, 체세포 배 관계도 이야기 했다. 가지고 간 연구계획서를 내놓고 내애기를 하였드니 금방 이야기에 묻어 들어 왔다. 같이 연구를 하자고 하며 노팅검대학은 Life Science가 유명하니 서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까? 앞으로도 맞나야 될 사람이 3명이나 남아있는데 더욱 좋은 조건이 있을 지도 모르고 확실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연구계획서도 복사해 서 쓰라고(실은 두부가 더있었지만)했더니 2부를 복사해와서 한부는 자기 친구(Life science)에게 보이고 좋은 결과를 알려주겠 다며 내일 전화로 연락하고 했다. 우선 그럭 저럭 대답하고 식당에 서 식사 대접을 받고 연구실 실험실을 둘러보았다. 시설이 잘되어있고 아프리카, 인도에서 온 유 학생들이 열심히 실험하고 있다. 14시 23분 기차로 Loughborough를 떠나 Sheffield(15시 39분), 16 시 02분에 에딘버그행 기차를 타야 하기 때문에 14시전에 자기 차로 역까지 바래다 주고 기차가 떠날때까지 역에서 그 키다리가 전송을 해주었다. 선하고 착하게 보인 사람이였다. 나중에 그이력 서를 보니 1947년생 나보다 어린 나이다. 보이기에는 더 나이들어 보이는 그런 심성이 좋은 영국 시골 농부같은 모습이였다. 그러나 조직배양에 관한 유명한 책도 많이 내고 논문도 많이 내어 영 국내에서 뿐만아니라 세계적인 학자였다. Sheffield에서 Edinburgh까지 4시간여의 여행은 지루했 다. Doncaster--York--Darlington--Newcastle--Berwick--Edinburgh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 고 그리고 달린다. Newcastle부터는 바닷가를 달리지마는 밖이 어두워 잘보이지 않았는데 언젠가 밖에 둥근 보름달이 떠있다. 너무 크보여서 달이 아니고 다른 인공구조물인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 였다. 아 달이 크기도 하구나 하고 바라보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세계에서 지는 석양중 제일 크게 해가 보이는 곳이 헝거리의 호르트바시의 대평원에서 보인다고 하여 그곳의 페스티발이있는 7월 첫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찾아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해보다 더큰 달님을 보고 있다. 북해쪽 (도버쪽)의 달님이라 차거워 보이는 것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처럼 푸르디 프른 달빛이 가끔 보 이는 바다물위에 반사되어 보이기도 했다. 20시03분 스코트랜드 에딘바라에 도착하여 기차를 내리니 차거운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 들었 다. 몸을 움추려봐도 별소용이 없는 한파가 몰아쳤다. Schedule 대로 역을 돌아 나오 Taxi승강대 에서 택시를 타고 Glenisla Hotel(Dr. Alan John이 예약완료)로 갔다. 영어의 어감이 매우 다른 곳 이다. 택시운전사도 부드러운 영어가 아니라 딱딱 끈어지는 것같은 좀 어둔한 말투다. 시내를 약 30분 달려 여관에 도착하였다. B&B 20pound인데 10% 할인 해준다는 주인 아주머니의 말(연구소 에서 예약 손님에 한해서 우대 해준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오는 택시비가 7파운드이니 상당히 비 싼편이였다. 방이 크고 깨끗하다. 주인도 친절하고 나말고 손님이 몇팀이 더있었다. 내일 9시 30분 에 자동차로 마중온다고 했으니 충분하게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28일 아침 9시 30분 약속시간에 Alan John이 보낸 학생이 차를 가지고 호텔로 왔다. 한쪽귀 에 귀걸이까지 한 남자이면서 여자처럼 보이는 그런 류의 학생이였다. 실은 Karnoski가 나의 연구 의 counterparter로 가장 유력하게 찍어준 사람이 Forest Commission에 있는 Alan John이였기 때 문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어제 Alderson의 제의에도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산이 보이고 높은 봉우리가 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동쪽으로 가는지 밝은 해가 눈이 부 시게 만든다. 30여분 달려 Forestry Commission에 도착했다. Alan의 방으로 안내 되었는데 무슨 영화배우 같이 생긴 친구가 큰손으로 악수를 청한다. 노란 머리를 뒤로 넘겨 고무줄로 묶어 여자처럼 하고 있고 입고 있는 옷도 청바지에 그저 그런 윗옷차림 젊은이들의 우상인 가수같기도 하고 이름도 그럴듯 한 알란죤이였다. 여하튼 내연구계획서를 이야기 하기전에 자기 연구이야기와 연구소 내용 을 소개 해 준다. 공동연구에 대한 이야길 했드니 Alderson교수가 적임자라고 이야기하면서 fax로 내편지를 Alderson에게 보내 라고 이야길 한다. 마음먹고 왔는데 그렇게 말하니 한심스러운 생각 도 들었으나 별도리가 없었다. 그자리에서 콤퓨터로 편지를 써서 Alderson과 공동연구를 하겠으니 Biodata와 Scientific Career를 fax로 독일연구소로 2월 1일까지 보내달라는 내용을 펙스로 부쳤다. 속으로 미안한 생각도 들었으나 Alan의 연구시설을 보고는 공동연구를 할 처지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할수없는 일이였다. 소위 마르니에라고 부르는 칠엽수 horse chestnut이 특수 의약품 개발 을 위해 조직배양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계속 쉬지않고 돌아다니고 fax를 보내고 전화하고 나 에게 설명하고 그리고 직석에서 만든 샌드위치를 점심대신 먹자고 한다다. 거침없이 자기식대로 사는 사람의 면모가 보였다. 점심후 1시 30분쯤 옆에 있는 생태연구소로 Newton박사를 맞나로 가자고 걸어가는데 햇볕은 비추지만 우리나라 서산에 걸린것 같은 다죽어가는 햇빛으로 추위를 쫓는데는 별무효과이다. Newton박사는 30이 체될가 말가한 젊은이인데 30분간 나의 Gene conservation에 대한 background를 듣고 연신 wonderful, beatiful을 연발하였다. 자기가 하고있는 Norway spruce집단 에 대한 것과 같은 방법의 적용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지구서쪽 끝에 와서 같은 생각을 가진 젊은 학자를 맞나고 있음이 반가웠다. 1시간여 의견을 교환했으나 공동연구 이야긴 하지 않았다. 저와 공동연구하기에는 너무어린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Alan연구실에 와서 작별인사를 하고 아침에 타고온 차로 은행에 가서 100파운드를 수표 로 바꾸웠다. 론돈에서 바꾼 돈이 바닥이 났기 때문이다. 호텔로 안가고 4시30분인 시간에 에딘바 라역으로 가서 내렸다. 역구내 information에 가서 내일 하루를 조용히 쉴수있는 근방의 촌동내를 찾기위함이였다.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New Beriwck이라는 동내로 결정하고 민박소개서를 받 고 기차시간표도 받았다. 내일 아침 9시20분쯤 떠나기로 계획을 세우고 역앞쪽에 있는 언덕의 성 터에 올라 갔다. 어둠이 내려 깔리는 시내의 풍광은 아주 먼곳에서 온 이방인에게는 exotic한 분 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점멸하는 자동차헤드라이트, 북쪽 특유의 검은 그림자속으로 젖어 들어가는 고색창연한 교회의 첨탑들 그리고 언덕아래로 펼쳐진 항구의 모습, 언덕위에 돌로 쌓아 올린 높은 탑과 그옆에 서있는 돌기둥만 남아있는 성터 그리고 아우성 처럼 서편에서 몰려오는 검은 색깔의 모진 바람, 그속안에 혼자 서있는 것이다. 오후5시가 넘은 1월 28일 그시각에 그곳은 아무도 없는 텅빈 공간이였다. 그러나 마음은 가볍고 개운했다. 무었인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는 기대감 내지는 지금까지 무리없이 지내 왔다는 성취감 비슷한 것이 였다. 어제 저녁에 택시로 갔던 길을 2층 시내뻐스를 타고 찾아갔다. 호텔를 나올때 넣어둔 호텔위치의 지도가 요긴하게 쓰 였다. 역시 모든 정보는 잘챙기는 것이 중요한것 같다. 그리고 편히 쉬는 하루 밤이 지나갔다. 1월 29일 오랜만의 여행중에 조금 사치스럽고 고급스런 여행일정을 짠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창이 있는 방에서 푹 앉아 쉬고 그리고 느긋히 북풍에 이는 거친파도를 바라보고 싶은 것이 였다. North Beriwck 행기차표를 사는데 노우스 부리크, 전혀 안통합니다. 역시 스코트랜드 식 발 음인 노스빅이다. 조그만 마을 서편에 North Beriwck Law라는 언덕같은 산이 있고 驛舍도 없는 종착역, 큰길거리 양쪽으로 슈퍼, 약국, 중고품가게 그리고 푸주간, 선술집, 부서진 교회와 그뒤에 수개의 비석, 이러한 곳이 있는 작은 마을 이다. 바닷가 쪽에도 300메터에 달하는 포장길이 있다. 바닷가쪽 B&B를 찾아 물어 보았다. 바다가 보이는 방이 하나있는데 손님이 들어 있다고 했다. 항 구쪽(작은 고기잡이 배와 요트등이 정박된)으로 가서 마리네라는 집을 찾아가면 바다가 보이는 방 이 있을 것이라고 키가 작고 뚱뚱한 아주머니가 친절하면서도 자세히도 가르쳐 주었다. 무거운 가 방을 들고 항구로 가서 그집을 찾았다. 두번째 물어서 들어간 집이 바로 내가 찾든 그런 방이 있 는 집이였다. 녹크를 하고 기다리니 안에서 나온 아주머니 은발에 붉은 홍조를 띈 얼굴, 적당한 체격과 키 금방 어느 누구에게 라도 호감이 갈만한 모습에 또한 말과 제수츄워가 만점이다. 마치 한여름 무더위에 한입 가득히 먹어보는 아이스크림 맛과 비슷했다. 말인즉 자기집은 여름철만 open 하고 겨울에는 추워서 손님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더이상 다른 집을 찾으로 갈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때를 쓴 것이다. 두집이나 물어 보았으나 당신 집 밖에 창 문으로 바다가 들어오는 집이 없다고 하니 추워도 괜쁽다. 하루밤의 휴식을 할수있었으면 좋겠다 고 청했다. 1분정도 후에 이층 방으로 안내를 했다. 손님은 받지 않고 있으나 잘 정돈 되어 있었 다. 그리고 동쪽으로 난 크지 않은 창문속으로 도버의 북쪽 바다와 새들의 낙원이라는 Bass Rock 섬이 그대로 한폭의 그림이였다. 이층 응접실 베치카에 석탄을 때어서 추위를 녹여주었다. 역시 상냥하기 그지없는 그런 아주 머니와 그런 곳이였다. 바퀴달린 의자, 100년이 넘었을성 싶은 작은 피아노 양쪽으로 난 창넘어 바다가 다 보이는 응접실, 그옆 베치카에 석탄의 파랗불꽃, 높은 연통속을 타올라가면서 내는 바 람소리는 어릴때 듣던 도깨비 바람 소리 같은 것이였다. 그러나 푸근한 카펫위에서 그대로 녹아내 리듯 잠이 들었다. 눈을 띄니 오후 2시 다시 높은곳에 올라가서 봐야 직성이 풀리는 高所好氣性이 발동하여 마을 서편에 있는 North Beriwck Law라는 언덕같은 산에 올라 갔다. 맥주 한 깡통에 빵 두쪼각을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올라 갔다. 히스(테스소설에 나오는)라는 관목형 까시나무가 군데 군데 무더기로 나있고 그이외는 풀만이 있는 민둥산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올라 간다. 마치 몸이 거의 하늘을 날아가는 것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등뒤에서 휘몰아치는 광풍때문인 것 같았다. 얼굴을 돌릴수 없을 정도의 세찬 바람이 먼 평원 지대를 지나 이산위를 넘어 바다로 빠져나 간다. 30여분간의 死鬪(?) 끝에 612피트의 정상에 섰다. 서편은 광활한 목초지 군데 군데 면양이 풀을 띳고있고 동편은 검은 바다가 일렁이고 있다. 정상에 세워 놓은 돔모양의 탑은 바람결에 거 의 몸을 마끼고 자포자기 상태의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정상에 설수가 없다. 계속 쉬지 않고 부는 바람의 속도에 전율을 느낀다. 우리나라에서 바람은 가끔 숨을 쉴틈이라도 있었든 것같았는 데 바위틈에 의지해서 맥주 한캉통을 마셨으나 전혀 알콜기운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추위와 바람 탓이다. 저아래 바닷가의 모래사장이 보이고 그뒤에 빨간색 지붕을 한 집들이 질서있게 자리 잡고 그뒤에 오래된 숲이 자리하고 그다음이 높이 612피트의 이산이 있는 곳, 한눈에 훤이 동내가 들어 오고 내가 쉬고 있는 Mrs M. Marr의 흰창문틀에 빨간 벽돌집이 눈에 들어 왔다. 이제는 올라왔 으면 내려가야하는데 서편은 너무 바람이 세니 반대편인 동쪽으로 내려가야 수월 할것으로 머리 를 굴려 생각하여 동편으로 내려 온다. 풀밭 밖에 없어서 눈아래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손에 잡일 듯이 훤히 보인다. 작은 길을 따라 가보니 면양들이 다니는 길로 점점 낭떠리지 쪽으로 가까워졌 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고 낭떠러지쪽의 아래는 급경사지 한발 잘못 디디면 아찔한 생각이 들었 다. 산에서는 급하면 그자리에 앉아 쉬는 것이 정석이다다. 그래야 방향감각을 잃지 않기 때문이 다. 여기처럼 숲도 나무도 없는 곳에서야 방향을 잃을 염려가 없겠지만 두려움이 앞서서 그자리에 비스듬이 기대어 본다(기댈수 밖에 없을 정도로 경사가 심한 곳입니다). 수분이 지난뒤 다시 오든 길로 되접어 산귀퉁이를 남쪽으로 도는데 그제야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오고 수그루의 너도밤나 무 거목이 성벽처럼 거창하게 서있었다. 역시 수백년은 넘은 거목, 그대로 우러러 보였다. 거목들 의 나무사이를 지나 아래쪽에 울타리를 쳐놓고 몇가지 수종의 나무를 심어 살릴려는 방풍벽을 해 놓은 곳이 있었다. 영국은 옛날에는 전부 숲으로 덮여 있었든 곳 이제 다 개간하고 경작하여 그숲 이 10%밖에 없는 나라가 되었다. 내가 오른 이 산도 면양이 무리져서 산벽을 오르고 있다. 만약 삼림이 그대로 있었으면 그정도의 바람은 잘 막아 주었을 것이다. 새로운 삼림의 조성은 파괴하는 것보다 수십배의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았다. 우리나라 해안 사방조림의 원조인 해송을 갖다가 심 어 보면 어떨가 생각해 보았다다. 그러나 이렇게 쉬지 않고 불어대는 바람에 견디어 낼지 의문이 되기도 한다. 돌아가면 알랜 죤에게 이야기 하여 우리나라 해송종자를 보내줄 생각도 해 보면서 산을 내려 왔다. 꽁꽁 얼어 돌아온 몸을 베치까 앞에서 나나무스크리의 감칠맛나는 노래를 들으며 녹여 본다. 영국 여행에서 처음 맛보는 나릇한 감미로운 시간이다. 회색구름과 접한 바다 빛갈이 검회색으로 보인다. Bass Rock섬의 한쪽 귀퉁이에 위태롭게 서있는 하얀등대가 무너져 내릴 것같은 불안감에 사로 잡히는 것은 거칠게 일렁이고 있는 회색빛 바다색 때문일 것이다. 밤 8시 저녁을 먹어야 할것같아 세찬 바람속을 헤치며 거리로 나왔다. 모든 가게는 문을 닫고 선술집 한곳이 열려져있다. 노동자풍의 사람들과 동내사람들이 열서너명 모여서서 앉아서 맥주를 들고 있다. 흑맥주 한잔을 시켜들고 한쪽 의자에 걸터앉아 베치카 쪽의 장작을 이죽거리고 있는데 옆 테이불의 영감쟁이가 말을 걸어 온다. 분명히 영어인데 도대체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옆 에 있는 젊은이가 통역(표준영어)을 해준다. 그분은 스코트랜드 북쪽 사투리여서 알아들을수 없다 고 했다. 내 영어가 더욱 쉽게 알아들을수 있는 표준말인 셈이다. 두잔째 시켜 먹고 있는데 Newcatsle에서 왔다는 노동자풍의 사나이가 나보다 대뜸 35세가 아니냐고 물어왔다. 그래 가만히 있으니 자기 딸이 중국인과 결혼하여 홍콩에 사는 데 내가 그렇게 어려 보인다는 것이다. 그 나이 를 알고 보니 나보다 한살아래인 44년 생, 쉽게 통성명하고 자기가 흑맥주 한잔을 사서 내 테불로 가져왔다. 영국에서 처음 받아 보는 무료 서비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여관집으로 와서 카메라 를 가지고 가서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사진을 자기집에 꼭 보내달라는 부탁과 자기 집사람이름이 마리인데 보낼때는 Ken Martin인 자기 이름과 같이 자기 부인 이름도 쓰주면 즐거워 할거라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내가 보기에도 나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것 같았다. 늙어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세파에 견디어 왔다는 뜻일까. 늙은 고목처럼 큰 거목처럼 더 많은 생각과 뜻을 가지 고 있었다는 뜻일런지. 어뵖거나 고생을 많이 한것 같은 그의 손등과 어깨와 발등에서 말없는 항 변을 느꼈다. 저녁의 끼니는 흑맥주 3잔으로 때우고 오늘은 분위기만 먹고 지내는 하루가 되었다. 베치카의 주입구에서 굴뚝을 타고 올라가는 바람 소리는 여전히 도깨비 소리 같고 창문 밖에서 몰려오는 파도소리도 점점 거칠어 지면서 밤은 깊어 갔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숙면을 하였다. 일요일 날은 오전에는 North Beriwck에서 에딘버러에 가는 기차가 없었다. 1시20분에야 에딘 바라에 가는 첫열차가 있다니 오전시간을 때워야 했다. 계획을 세우고 아침을 먹었다. 상냥한 주 인 아주머니 어제 부터 나보고 fish를 좋아하냐고 해서 그런대로 좋아한다고 했더니 오늘 아침에 는 특식으로 물고기 요리를 해준다고 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분위기로 때웠으니 오늘 특식은 기 다려 지는 것이 당연한 일, 그러나 나온 것이 가제미를 더운 우유로 끊인 묘한 음식이였다. 그러 나 말라 빠진 햄버그 보다는 좀 나은 편인 그런 것이지만 처음 먹어 보는 음식 치고는 거부 감은 없었다. 그 아주머니의 정성을 보아 우유까지 말끔히 치웠다. 선전책자(North Beriwck의 관광책 자)의 모델사진에 나와 있는 바로 그 아줌마였다. 기념으로 사진도 같이 한장을 찍고 그 선전 책 자를 얻어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기집은 오픈한 1984년 이래 동양인은 처음왔다는 것이다. 환 대를 받은 값으로 sign책에 한자 적고 하루숙박과 아침식사대를 포함한 일금 13파운드를 내고 11 시 30분에 집을 나왔다. 어제의 회색빛이 모두 사라지고 맑고 밝게 빛나는 햇살에 온천지가 생동하였다. 바다가 변했 다. 초록빛 바다색에 은빛 파도 역시 바다는 햇빛을 먹고 사나 보다. 바람은 세차지마는 어제보다 는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바닷가 모래 사장을 거닐어 봅니다. 파도에 젖은 모래위로 바람에 마른 모래알 들이 모래파도를 만들 면서 지나간다.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가 부?치면서 묘한 소리 를 낸다. 몇몇의 노부부의 관광객들이 두꺼운 코트와 모자 차림으로 서너군데에서 보였다. 바다와 노부부 그리고 북극해의 찬란한 바다색, 오늘은 바람속에서도 평화을 느낀다. 1시20분 출발한 기차가 30분이면 도착하는 에딘바라에 1시간 30분을 소비하고 도착하였다. 도 중에 교통사고가 나서 단선 운행을 했기 때문이다. 차장의 설명도 알아듣기 어려워 불가리아에서 유학왔다는 옆자리 학생의 이야기로 그 사정을 알았다. 론돈에 5시 전에 들어가 여관을 정한후 내 일 아침 East Malling에 갈 계획이였는데 결국 3시가 넘어 에딘바라를 출발하여 론돈에 8시가 넘 어서도 30분이나 더 지나서 도착하였다. King Cross역에 도착하여 Tube를 타고 빅토리아역으로 갔다. 빅토리아역 앞에서 Belgrae Road를 찾아갔다(세계를 간다 책자의 도움을 받은것). 그곳에는 값싼 B&B가 많다고 해서다. Kiness House를 찾아 아침없이 18파운드의 잠자리를 정해 놓고 밖 에 나와 선술집에 가서 맥주 한잔에 목을 추기고 있는데 한국 배낭족 2명이 내게 와서 한국에서 왔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들은 한국에서 온 학생이라고 하는데 한명은 인천대를 졸업하고 영국 배 낭여행왔고, 한 학생은 중앙대 경제과를 다니다가 독일 Kolen에 있는 대학에서 어학 연수중 친구 가 영국에 온다기에 안내차 왔다는 것. 옛날 같으면 맥주라도 한잔 사주었겠으나 아무것도 사주지 않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값싼 치기에 불과하다고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에 아주 불안해 하 는 젊은이들, 앞날의 환한 전망이 없고 선택한 전공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없는 그런 상태인것 같 았다. 나역시 그들 입장이라면 마찬가지 였겠지요. 그러나 그기 까지 그들 인생을 스스로 끌고 온 것 만으로 대단하다고 생각 하였다. 그리고 목적과 수단을 착각하지 말라는 충고도 했다. 이러한 말을 하는 자신이 약간은 부끄러워 져서 너무 큰소리로 말하고 있음을 느끼고 곧 목소리를 나추 웠다. 그리고 저의 18번인 內村鑑三의 이야기를 하였다. 어느듯 론돈의 마즈막 밤도 11시를 넘었 다. 여관에 돌아와 샤워도 하고 먼저 싸온 정장을 다시 수습하여 내일 입고갈 채비를 해놓고 잠자 리에 들었다. 31일 아침 마즈막 영국 여행일정이 시작되는 날이다. 07:49 론돈 빅토리아역을 출발 Maidston East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왔든 길을 되돌아 East Malling에 오는 것이다(타고 간것이 급행이라 서 East Malling에서 정차하지 않기때문에 Maidston East 역에서 완행으로 갈아타고옴). 0907분에 역에 당도하니 펜더곰같이 귀엽게 생긴 (덩치는 북극곰마냥 크지만)얼굴에 수염을 기른 Dr. Neil Hammett가 역에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번쩍들었다.. 자기 차로 10분여 걸려 Horticultural Research International에 도착하였다. 11시09분 기차로 Ashford로 떠나야 한다는 일정표를 알고있 기 때문에 두시간을 풀로 이용할수 있도록 안내를 하였다. 조직배양실, 물푸레나무, 체리에 대한 대량증식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있는 과수목의 저온저장등, 나의 plan에 대한 이야길 듣고 체세포 배양에 관한 연구를 할수 있으면 연구비를 얻어 낼수있다고 하면서 는즈시 권하는 눈치였다. 그러 나 내가 이나이에 부담을 안고 post-doctor같은 일을 할수는 없었다. 다음 좋은 기회가 있으면 학 생이라도 천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현재 임목조직배양 fund를 가지고 있다는 Alan의 말을 듣고 지금까지 가지고 다니든 주석으로 만든 우리학교 기념 마크가 든 컵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Co-work도 강조하였다. 조직배양묘와 실새묘의 비교식재지 그리고 자작나무 시 험지등을 차로 돌아보고 역에 오니 발차 시간 2분전, 2시간을 낭비없이 full로 이용한 시간 운영이 비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결혼도 않고 혼자 산다고 그것은 free life라고 말합니 다. 동양의 고지식을 가진 저에게는 이상하게 들렸읍니다. 11시09분 East Malling에서 Ashford를 향해 기차가 달렸다. 비슷한 능선이 보이고 목초지가 보넓게 펄쳐진 평야지대를 지난다. 우리나라에는 높 산위에 나무가 서있는데 이곳은 저지대 개천 주변에 나무 숲이 모여있다. 대조적인 풍광이지요. 11시49분 Ashford에 도착했다. 전화박스를 찾 아 Sinclair Mantill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에서 오늘 자기 차가 없어 마중을 나가지 못하니 Taxi를 타고 학교까지 오라고 했다. 한 30분 쯤 걸린다고 한다. Taxi 운전사가 담배를 퍽퍽 피우 면서도 운전을 잘도 하면서 시골길을 달린다. 정돈된 과수원과 포도밭 그사이를 오래된 주택들이 모여있고, 구불 구불한 도로는 오래전에 포장이 된것 같았다. 건널목을 지나 Wye College 입구 오래된 건물의 성당 입구 같은 돌집 앞에 세워주고 Taxi는 간다. Kanoski schedule에는 6.30파운 드라고 적혀있는데 6.20파운드의 요금이 나왔다. 얼마나 빈틈없는 계획표인지를 느꼈다. 수위실에 가서 Dr. Mantill에게 전화를 해주라고 부탁하니 그방에 전화를 해서 한참후에 키가 훨출하게 큰 Dr. Mantill이 나왔다. 무거운 짐을 직접들고 미로 같은 건물 사이를 빠져 나간다. 그레서 작은 그 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저는 하나 밖에 없는 clean bench(조직배양 할때 필수적인 무균 system)가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각 symposium에서 발표한 포스터 들이 벽에 계속해 걸려있다. 말이 쉽고 전혀 거부감이 없이 제말을 이해 해 준다. 역시 아프리카 유학생, 부라질 유학생, 대만유학생등의 잡다한 엉터리 영어에 능숙한 탓인것 같았다. 책도 많이 쓰고 연구도 많이 하고 지금도 잠시도 쉬 지않고 열심히 하는 사람임을 느낄수 있었다. 일본에서도 번역이 된 植物のバイオテク 의 저자이 다. 본인의 연구를 자세히 설명하고 연구비 Source도 잘알려주었다. EC에서 Yam(야자수일종)의 연구로 상당한 연구비를 받아 부라질 교환교수와 연구중이라고 했다. 내가 15:45분 Wye를 떠나는 schedule이여서 바삐 서둘러서 온실 실험실 저온저장실등을 보여 주었다. 점심은 부라질에서 온 교환교수(여자교수)와 같이 학교 식당에서 대접받고 공동연구를 위한 fund를 같이 찾아보자고 이 야기를 하였다. 시원시원하고 메치지 않는 그런 서글서글한(すなおな) 성격의 소유자 같았다. 그리 고 학생들에게도 자상하고 친절한 그런 언행을 느끼고 보았다. 어쩐지 남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학자임에 틀림없었다. 딸하나 아들 하나 Oxford에서 Geography를 전공하고 딸은 Medicine을 전 공한다고 햇다. 부인은 part time 으로 부근의 고등학교에서 화학선생 오늘은 부인이 차를 가지고 가서 차가 없어 마중을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점심후 cryopreservation에 대한 전망 그리고 필요성등에 대해 이야기 하고 Wye역 까지 기차시간 15분 전에 걸어 나왔다. 무거운 가방쪽을 자 기가 들고서 성큼 성큼 걸어가면서 요즈음의 젊은이들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 크게 개탄하였다. 연 구실을 나오기전에 준 그의 이력서 경력 연구 발표목록은 내것의 5배쯤 되었다. 역시 최선을 다해 연구에 매진하는 학자의 기풍에 압도 되었고 진실성있는 그의 말에 매료 되었다. Wye College는 London대학교 소속으로 농학계통 학과인 원예학과, 식물병리과등이 떨어져 나와있으며 학생 800 여명에 교수 120여명의 가족적인 분위기의 학교라고 설명해 주었다. 역에서는 Ramsgate에 가는 기차를 타고 시간표 상 오후 5시 30분에 떠나는 jetfoil을 타고 Dover를 건너 20시30분에 Oostende에 도착 기차로 독일에 갈 계획이였다. 모든 일정을 schedule 대로 마치고 기차가 떠나는 역에서 전송도 받고 마즈막 항구로 달려 간다. 창밖의 첨성대 모양의 원자력 발전소의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 구름을 배경으로 한 풍광이 어쩐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첨성대 모양의 굴뚝위에서는 연기 인지 수증기인지 분간 못할 안개 같은 것이 하늘로 흩 어져 올라 가고 있었다. 환경 오염과 방사능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위지 하기위한 환경을 보존하자 는 우리들의 보잘 것없는 노력이 파괴 되어 갈수 밖에 없는 지구를 보전 할수 있을 것 같지 않았 다. 여기도 숲들이 띄엄 띄엄 보이지만 잘가꾸워 지지 않은 것들이였다. 숲들이 목장과 포도 밭 사이에 외로운 섬들처럼 남겨져 있었다. 앞으로 계속되는 경작지 확장 앞에 그러 무기력하게 내 맞겨져 있는 그런 외로운 모습의 숲들 처럼 느껴 졌다. 오후 5시 경 Ramsgate에 도착 항구에 있는 Jetfoil를 물어보니 3월 달부터 운항하고 18시 내 가 올때 타고 온것과 같은 Ferry가 떠난다고 했다. 소형 버쓰를 타고 ferry표를 끈었다. 유레일 pass가 있다고 하여 30%할인 한 가격 16.30파운드, 주머니에 있는 모든 동전을 총동원하니 거의 맞아 그것으로 영국 파운드는 1 penny도 없이 소진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아주 계획을 잘 세워 추진한 것같은 모양세를 가춘 여행이 되었다. 전체 쓴 경비 249파운드에 기차표 $200US 로 7박 8 일 간의 영국 여행을 마친 것이다. 배는 같은 날 밤 10시 40분 도착 예정이였으나 11시에 도착하 니 기차가 다 끈어지고 새벽 3시 40분에 Bruxell행 기차가 첫차였다. 역사에서 새벽까지 기다려야 만했다. 천정이 높은 유롭 특유의 驛舍는 설렁한 나무의자가 몇개 놓여 있을 뿐 사방에서 바다 바 람이 펄펄 들어 왔다. 그렇다고 그시간에 여관에 들어가 기다리기도 쉽지않아 그렇게 않았다 구 부렸다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배를 타고 와서 같은 처지에 있는 몇몇의 여자 승객중 불가리아 철도국원이라는 40대 초반의 여자가 말을 걸어 왔다. 한달 반 동안 London에 있는 어학 훈련원에 서 영어 훈련을 받고 온다는 것, 런던에는 자기 동생이 약국경영을 하면서 잘살고 있어서 자주 오 지만 역시 영어가 잘 안된다고 푸념을 하였다. 별로 통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잡고 있 었다. 옆에 또 부라질에서 왔다는 25세 (나이보다 훨씬 어려게 보였읍니다) 소녀 같은 학생풍의 여자가 능숙한 영어(아메리카의 콩기름 바른 것같은 메끈한 발음)로 부라질에서 어느 회사의 영어 지도교사라고 하고 Texas에서 4년간 공부했다고 했다. 자기 친구가 Oxford에서 2개월 짜리 연수 (어학)를 받으로 와서 같이 봐주고 간다고 했다. 친구인 폴트칼 출신은 같은 또래의 나이라고 하 지만 더 들어 보였는데 2개월간에 ($2,000US: 숙식 학원료를 포함)배웠다고 하지만 초보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들을 보니 이렇게 젊어서 어학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아 무리 쓸대 없는 이바구를 하면서 시간을 죽여도 참 더디게 가는 것이 이럴때의 시간 이였다. 잠 간 나무의자에 등을 내리고 발을 길게 뻗고 눈을 붙이다가 드디어 03시40분 Bruxell행 기차를 탔 다. 뜨뜻한 steam에 이제 살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8시에 Lege에서 Frankfurt가는 특급을 갈아 타고 12시 04분 Frankfurt에서 Gottingen가는 기차를 타고 Kassel에서 Hann Munden에 도착하니 오후 2시 40분 온몸이 솜같이 무겁고 피곤했다. 아직 3주밖에 기거하지 않았든 집인데도 긴여행에서 돌아오니 내집 같은생각이 드는 것이다. 역시 사람의 적응력이란 대단한 것인가 보다. 역에서 집까지 20여분 걸어와 짐을 풀고 옷을 갈아 입고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연구소를 향했다. 연구소에는 고국에서 온 몇가지의 소포와 편지가 기 다리고 있었다. 대충 들러 보고 (지난번 실험 해놓은 재료들) 다시 집에 와서 그대로 녹아 떨어졌 다. 영국의 일정을 계획대로 마치고 여러 대학과 연구소의 연구현황을 견학할수 있는 좋은 기회 였고 특히 노팅검대학의 Peter Alderson박사와의 공동연구계획은 앞으로 추진해 야할 과제로 남 아있다.